안녕하세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wisedog 입니다.

지금 연재하는 글은 "북방십자군 이야기" 입니다. 십자군 전쟁이라 하면 거의 절대 다수가 유럽세계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서 행한 무력 행위라고 이해합니다. 80%는 맞는 말입니다. 물론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 탈환이지만, 엄연히 목표는 "이교도 퇴치"였고 이 "이교도"들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현 폴란드 북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이교도"가 터전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와 폴란드 북부, 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이교도를 개종시키기 위해 일어난 "북방십자군" 역시 크게 봐서는 십자군의 한 갈래입니다. 이 글은 북방십자군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로서 크게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TOC

서장 - 독일 왕국 & 제 1장 - 황제와 교황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은 '카놋사의 굴욕'부터 북방십자군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다룹니다.... 만.. 갑자기 하인리히 4세를 등장시키자니 독일 왕국의 역사를 아무것도 모르고서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리히 4세의 부황인 하인리히 3세부터 시작할까 하다가 선대로 올라가기로 하였고 결국 오르고 또 올라서 독일 왕국이 성립될 때부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2장 - 이교도의 땅

북방 십자군이 발트 인근의 땅을 정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예정입니다. 주 무대는 발트해 인근 독일 및 폴란드 북부, 발트 3국입니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제 3장 - 기사의 황혼

대북방 전쟁부터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세우고 공작이 되는 1525년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자료

주로 2차 사료를 바탕으로 글을 썼고, 의문나는 점이나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1차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1차 사료는 주로 영어로 번역된 내용을 참고했으며 가끔씩은 독일어 전공자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2차 사료는 주로 논문을 참고했습니다. 독일어를 배우고 있긴 하지만 아직 책을 읽을 수준은 안되고 영어로 된 책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림이나 사진은 어쩔수가 없이 위키피디아의 힘을 빌렀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명 및 인명

독일 위주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독일어 기준으로 지명과 인명을 정했습니다. 다만 각 지방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하였습니다.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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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점

이 글은 원래 제 브런치에서 작성하기 시작했던 글이지만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타지 말고 스스로 이뤄보고 싶어서 이렇게 호스팅까지 세팅했습니다. 글에 대해 문의점이 있을 경우 여기에 이슈 제기를 해주시거나 Pull Request를 날려주십시오.

서장

이 서장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는 9세기 경부터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카놋사의 굴욕"까지 다룹니다.

원래 서장은 따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장에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은 '카놋사의 굴욕'부터 북방십자군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다룰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갑자기 하인리히 4세를 등장시키자니 독일 왕국의 역사를 아무것도 모르고서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리히 4세의 부황인 하인리히 3세부터 시작할까 하다가 선대로 올라가기로 하였고 결국 오르고 또 올라서 독일 왕국이 성립될 때부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편 독일 왕국의 시작

1076~1077년 겨울, 유럽에 기록적 추위가 찾아왔다. 프랑스의 센강같이 작은 강은 물론 독일의 라인강과 같은 큰 강도, 심지어 따뜻한 기후의 북부 이탈리아 포강도 꽝꽝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 매서운 추위 속에 수도사 행색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수도사들이나 입는 얇고 거친 옷을 입고 있었고 신발도 신지 않았다. 그 수도사는 누구를 기다리는 듯, 용서를 구하는 듯 굳게 닫힌 카노사 성문 앞에서 하염없이 있었다. 먹지도 않고 추위에 떨기를 3일째 되는 날, 마침내 카노사 성문이 열렸다. 그제야 그 수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수도사의 이름은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 독일과 프랑스 일부,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성문을 열고 하인리히를 불러들인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였다.


2017년~2018년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TV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을 방문해본 적이 없는 외국인 청년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문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당혹감, 신기함 등의 반응을 재미있게 편집한게 인기 비결이다. 이 외국인 친구들의 반응 외에도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한 명이 아니라 3명 이상의 친구들이 초대되다보니 각 나라 특유의 행동 습성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에서 온 남자 3명의 행동 습성은 “역시 독일인" 이라는 찬사를 자아내게 했다. 한국에 오기 전 여러 권의 여행 안내 책자를 시험 준비하듯 샅샅이 읽고 이를 바탕으로 짠 여행 계획서는 그 꼼꼼함이 시청자들의 감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방송에서는 이런 독일인의 철저한 준비성에 초점을 맞춰 시청자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 특징이 있었다. 바로 리더의 지시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독일편

페터, 마리오, 다니엘 중 가장 리더 기질이 다분한 페터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리더 역할을 했다. 마리오와 다니엘은 페터와 자신들 사이에는 어떠한 신분의 차이가 없음에도 묵묵히 페터의 말을 따랐다. 사실 마리오와 다니엘이 페터의 지시에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냐'라고 싸워도 논리적으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분쟁을 통한 혼란 대신 복종을 통한 질서를 택했다.


이런 독일인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독일은 역사적으로 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고 히틀러와 같은 절대 권력자가 있었으며 이 절대자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늘 분열되어 있었다. 이 분열은 1871년에 이르러야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끝이 났다. 통일된 국가의 이름은 ‘독일 제국'이었다. 이름에서 뭔가 강력한 황제의 권력이 느껴지지만, 이름과 달리 황제의 권한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독일 제국은 완벽한 중앙집권적 통일이 아니라 현재 미국과 같은 연방제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제국 황제는 미국의 대통령처럼 국가(제국)를 대표하고 오직 군사, 외교권만을 지배했다. 이를 반대로 얘기하자면 각 연방과 자유 도시는 군사, 외교권만을 제외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제는 사라지고 대신 총리가 남았지만 지금도 각 지방의 자치 수준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런 경향은 독일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서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현재 프랑스 지방을 중심으로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전성기 프랑크 왕국은 현재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스위스, 오스트리아 전역과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스페인 일부를 아우를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프랑크 왕국이 계속 이어졌으면 유럽 연합이 1500여 년 일찍 생겼을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843년에 3개의 왕국으로 쪼개진다. 프랑크 왕국의 왕 루이 1세(독일어로는 루트비히 1세)가 죽고 그 당시 프랑크족의 관습인 남자 균일 상속제에 따라 아들 세 명이 왕국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베르됭 조약'인데 이 조약이 현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분기점이 된다.

베르됭 조약

베르됭 조약으로 갈라진 프랑크 왕국(출처: 위키피디아,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4.0 International )

큰아들인 로타르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을, 둘째 아들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을, 막내 아들 샤를은 제국의 서쪽을 차지했다. 이를 각각 중프랑크/동프랑크/서프랑크 왕국이라고 한다. 이중 동프랑크 왕국은 현재 독일의 모태가 되었고 서프랑크 왕국은 현재 프랑스의 모태가 되었다.

이 중 동프랑크 왕국을 집중해서 보자. 루이 1세(혹은 루트비히 1세)의 아들 중 루트비히 2세가 라인강 동쪽을 가져가면서 생긴 동프랑크 왕국은 증손 대인 루트비히 4세에 이르러 왕권이 매우 약해졌다. 루트비히 4세는 유아왕(영: Louis the Child, 독: Ludwig das Kind)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겨우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그 국가의 통치 체계가 확고하지 않은 한, 어김없이 귀족들의 힘이 세지는 현상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았다. 게다가 몸이라도 건강하면 모를까 루트비히 4세는 허약한 체질이라 자주 아팠기 때문에 왕국의 통치는 전적으로 귀족과 주교의 손에 맡겨졌다. 귀족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이 시기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 공작령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리게 된다.

루트비히 2세의 상상화

루트비히 2세의 상상화(출처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911년 루트비히 4세는 ‘유아왕’이라는 별명을 떼지도 못한 채 18세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이로써 루트비히 2세부터 내려온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자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다음 동프랑크 왕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911년 11월 10일 현 독일 포르크하임(Forchheim)에 모였다.

황제와 교황(2) - 게르만 사람들의 왕위 선거

독일 최대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곳,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 그리고 나치의 발상지이기도 한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에 가면 빨간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문양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뉘른베르크 성

뉘른베르크 성 근처. (출처 : 직접 찍음)

이 문양은 과거 뉘른베르크가 속했던 프랑켄(Franken) 지방의 문장이다. 일명 프랑켄 갈퀴(Fränkischer Rechen)라 불리는 패턴인데, 뉘른베르크뿐만 아니라 과거 프랑켄 지방에 속했던 도시의 문장(Coat of Arms)에는 어김없이 프랑켄 지방의 문장이 들어있다. 아래 사진은 왼쪽(모바일이면 위에서)부터 뉘른베르크, 뷔르츠부르크(Würzburg), 안스바흐(Ansbach)의 문장이다. 모두 빨간색과 하얀색의 프랑켄 지방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문장 뷔르츠부르크 문장 안스바흐 문장

프랑켄 지방은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터진 나폴레옹 전쟁에서 바이에른 공국이 프랑스와 반프랑스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한 결과 프랑켄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바이에른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곳이 과거 프랑켄 지방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바이에른주의 하위 행정구역인 오버프랑켄/ 미텔프랑켄/ 운터프랑켄 (Ober/Mittel/Unterfranken)현이라는 이름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프랑켄 지방과 바이에른 지방의 차이를 느끼고 싶다면 뉘른베르크에서 ICE를 타고 남쪽으로 40분 정도만 가면 된다. 첫 번째 정차지인 잉골슈타트(Ingolstadt)라는 도시는 뉘른베르크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 도시에서는 뉘른베르크에서 많이 보던 프랑켄 문양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고 바이에른의 색(푸른색과 흰색)이 대부분이다. 잉골슈타트는 예전부터 바이에른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켄 지역과 바이에른 지역은 사투리도 다른데 과거 바이에른 지역은 Bayerisch라고 부르는 바이에른 사투리를 쓰고 프랑켄 지역은 Fränkisch라는 사투리를 쓴다. 같은 바이에른주지만 말이다.


루트비히 4세가 동프랑크를 통치하는 시절에 성장한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 공작령을 동프랑크 및 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Stem duchy)이라고 한다. 이들 아래 지도는 919 -1125년 당시 중부 유럽의 세력 지도인데, 여기에 5대 부족 공국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현재 독일 지도와 같이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5대 부족 공국에 대해서 짧게 설명해보자.

1000년 경 중부 유럽의 세력 지도

1000년 경 신성로마제국의 세력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 Unported, 2.5 Generic, 2.0 Generic and 1.0 Generic license.)

작센 공작령

위 지도에서 맨 위 녹색 영역이다.(지도 상에서 Duchy of Saxony라고 쓰인 부분) 독일어로 Sachsen, 영어로 Saxony라고 한다. 역사 속에서 작센이라 불리는 지역은 현재 독일의 작센주가 아닌 니더작센(Niedersachsen), 작센-안할트(Sachsen-Anhalt),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리안(Nordrhein-Westfalen) 일부다.

프랑켄 공작령

작센 공작령 아래 녹색 영역이다.(지도 상에서 Duchy of Frankonia 라고 쓰인 부분) 독일어로 Franken, 영어로 Frankonia라고 한다. 현재 독일 바이에른주 북부에 해당한다.

슈바벤 공작령

프랑켄 공작령 아래 짙은 영역이다. (지도 상에서 Duchy of Swabia 라고 쓰인 부분) 독일어로 Schwaben, 영어로 Swabia라고 한다. 현재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Land Baden-Württemberg), 프랑스 알자스 지방 일부, 스위스 동부, 리히텐슈타인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바이에른 공작령

슈바벤 공작령 오른쪽 초록색이 바이에른주다(지도 상에서 Duchy of Bavaria 라고 쓰인 부분). 독일어로 Bayern, 영어로 Bavaria라고 한다. 현재 독일 남동부에 있는 바이에른주, 오스트리아 서부 지역이다. 영토에 부침이 있으나 천 년 넘는 긴 시간 동안 현재 뮌헨(Müchen)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지역에서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다. 독일 통일 당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에 마지못해 따라갔지만 그래도 독일제국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인식도 “프로이센 놈들이 일으킨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 간” 전쟁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을 정도였다.

로트링겐 공작령

프랑켄 공작령과 작센 공작령 왼쪽의 진한 녹색과 상대적으로 연한 녹색 지방이다(지도 상에서 Duchy of Upper Lorraine, Duchy of Lower Lorraine). 독일어로 Lothringen, 영어로 Lorraine이다. 현재 프랑스 알자스/로렌 지방,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방이다. 855년 중 프랑크 왕 로타르 1세가 죽으면서 남자 균일 상속제에 따라 세 개의 나라로 갈라진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긴 하지만(베르됭 조약), 차남 로타르 2세가 알프스 이북의 중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이 지역을 '로타르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Lotharingia'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는 로트링겐(독일어), 로렌(프랑스어)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로타르 2세는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어서(869) 로타르 2세의 삼촌이자 동/서 프랑크 왕국의 왕인 루트비히 2세와 샤를이 나눠가지게 되었다.(메르센 조약, 870) 지도 위에서는 상(上, Upper) 로트링겐, 하(下, Lower) 로트링겐으로 나뉘어서 표시되어 있는데, 참고로 상/하의 기준은 알프스 산맥 기준이다. 아무래도 알프스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해발 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상 혹은 ‘높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북해에 가까워질수록 해발 고도 0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하 혹은 ‘낮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참고로 독일 북부, 네덜란드에서 쓰이는 독일어를 ‘저지 독일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저지 역시 낮은 곳(低地)이라는 뜻이다.

다시 이야기를 루트비히 사후 차기 동프랑크 왕위 문제로 돌려보자. 루트비히 4세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 후보자 중 한 명은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이자 서프랑크의 왕인 샤를 3세(Charles III)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피를 이어받고 있던 샤를이었기에 혈연을 중시하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기에는 이론상으로 전혀 흠이 없었다. 하지만 동프랑크의 공작들은 결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샤를 3세가 왕위에 오른다는 말은 곧 자신들의 좋은 시절이 끝난다는 말과 같았다. 공작들이 마음대로 다를 수 있었던 전임 왕 루트비히 4세와 달리 샤를 3세는 제일 먼저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시킬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왕조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자를 왕으로 세우기에는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기가 힘들었다.

머리를 맞댄 공작들은 절묘한 해법을 찾았는데, 바로 루트비히 4세의 부왕 아르눌프의 딸의 아들 - 루트비히 4세의 외조카이자 자신들과 같은 공작이었던 프랑켄 공작 콘라트(Conrad I)를 동 프랑크 왕으로 선출한 것이다. 콘라트는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공작의 지지를 얻어 동프랑크 왕국의 왕 콘라트 1세가 되었다. 참고로 콘라트 1세는 스스로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이라 호칭하지 않았지만 후대에서는 콘라트 1세를 독일 왕국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 콘라트 1세

왕좌에 앉아있는 콘라트 1세(출처 : 위키피디아)

콘라트 1세는 왕이 되었지만, 선거로 뽑힌 왕이고 공작 중 한 명이다 보니 왕권이 극히 약했다. 반장선거로 뽑힌 반장이 친구들한테 엎드려뻗쳐라고 명령하면 “네가 뭔데 감히"라고 코웃음을 칠 터, 어제까지 자신들과 같은 공작이었는데 왕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없던 왕의 권위가 생기지 않는 노릇이다. 게다가 마자르(Magyar)족의 잦은 침략은 안 그래도 불안정한 왕권에 치명상을 입혔다. 마자르족은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 이후 연례행사처럼 1년이 멀다 하고 왕국을 침략했다. 마자르족을 물리치면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콘라트 1세는 이상하리만큼 마자르족의 침공에 일절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마자르족의 격퇴는 오직 각 지방 공작들 몫이었다. 로트링겐 문제도 콘라트 1세의 발목을 잡았다. 즉위 직후 로트링겐 공작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충성을 거부하고 서프랑크 왕국에 합류해버렸다. 이 때문에 콘라트 1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사방에서 반란이 들끓었다. 작센 공작 오토(Otto)는 콘라트 1세의 즉위는 찬성했지만 튀링엔(혹은 튀링겐) 지방의 영유권을 두고 콘라트 1세와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이 일로 앙금이 쌓였는지 오토가 죽은 후 아들인 하인리히(Heinrich)가 작센 공작 직을 이어받자 콘라트 1세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공작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는 곧바로 바로 콘라트 1세에 반기를 들었다. 슈바벤 공작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대신 더 큰 자치권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와 같이 반란을 일으켰다.

콘라트 1세는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반란을 일으킨 바이에른 공작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작센 공작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트링겐 지방을 되찾기 위해서 프랑크 왕 샤를 3세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었는지 아니면 힘이 달려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서프랑크로 넘어간 로트링겐 공작령을 끝내 되찾지 못했고 왕국을 침략한 마자르족에게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등 왕국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다. 고군분투하고 있던 콘라트 1세에게 예상보다 일찍 종말이 찾아왔다. 다시 반란을 일으킨 바이에른 공작과 싸우던 중 입은 심한 부상으로 콘라트 1세는 재위 만 7년 만인 918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콘라트 1세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남동생 에버하르트(Eberhard)에 왕국을 물려줘도 무리는 없었지만, 콘라트는 동생 대신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독일의 공작 중 가장 세력이 강해서 서프랑크와 왕국을 위협하는 주변 세력 - 마자르족, 슬라브족, 노르만족-에 맞서 왕국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평생의 라이벌에게 독일 왕이라는 멍에를 지우는 소심한 복수일지도.

작센의 시대

프랑켄 공작이자 동프랑크(독일) 왕이었던 콘라트 1세의 동생 에버하르트 3세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형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 하인리히는 919년 프리츨라(Fritzlar)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독일 왕(하인리히 1세)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의 별명은 ‘매사냥꾼’인데 그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가 마침 매의 둥지를 고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전혀 없어서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하고 있다. 하인리히 1세는 프랑크족이 아닌 최초의 독일 군주이자 독일의 왕과 황제를 배출한 오토(Otto) 왕가의 시조였다.

왕관을 전하는 사자와 마침 매 둥지를 고치고 있던 하인리히(출처 : 위키피디아)

왕관을 전하는 사자와 마침 매 둥지를 고치고 있던 하인리히(출처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한편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한 제국의회에는 오직 프랑켄과 작센 귀족들만 투표에 참여했고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투표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 두 지방 귀족들의 투표 불참은 명백하게 하인리히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리히가 왕이 되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는 하인리히에 반발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하나의 왕국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는 법, 곧 하인리히와 아르눌프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919년 하인리히는 먼저 슈바벤 지방으로 전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치기 위해서였다. 하인리히의 군세를 본 부르하르트는 하인리히에게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충성을 하기로 하였다. 아르눌프는 하인리히에 맞서는 쪽을 택했다. 결국 92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농성하던 아르눌프는 성문을 열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하인리히는 끝까지 자신에게 반항했던 바이에른 공작을 용서하고 자치권과 일부 특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지었다. 바이에른 문제만 붙잡고 있기에는 독일 왕국을 위협하는 시급한 문제가 너무 많았다. 동쪽의 마자르족, 북쪽의 데인족(현 덴마크, 스웨덴 남부에 거주하는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 수시로 국경을 짓밟고 있었다. 전왕 콘라트 1세 때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트링겐 공작령과 그 배후의 서프랑크 왕국도 불안 요소였다.

하인리히는 먼저 로트링겐을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되찾았다. 923년 서프랑크 왕국 내에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자 하인리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트링겐을 공격했다. 결국 925년 로트링겐 공작 길베르트는 하인리히에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독일 왕국은 4대 공작령(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프랑켄)에서 루트비히 4세 시절의 5대 공작령으로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하인리히는 작센의 북동쪽 슬라브족에 대해서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하인리히 이전에는 슬라브족을 간접적으로 지배했지만, 928~929년 원정부터는 아얘 직접적으로 영토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특히 929년의 렌첸(Lenzen, 현 독일 브란덴부르크) 전투에서 슬라브족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중 하인리히에게 남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동쪽의 마자르족이었다.

마자르족의 위협

역사상 하나의 민족이 대규모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9세기 후반 마자르족의 집단 이주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사건은 8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이라 불리는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한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 6세는 장인의 요청으로 불가리아 상품이 거래되는 교역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키로 바꾸고 불가리아 상인들에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을 매겼다. 이 조치에 불가리아의 지도자 시메온 1세는 크게 분노해서 즉각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제국을 공격했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가 공격해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로마 군단은 아랍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을 다시 불러오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근처에는 불가리아를 막을 군사력이 없었다. 레오 6세는 꾀를 썼다. 당시 불가리아 북쪽에는 유목민족인 마자르족이 살고 있었는데, 마자르족을 매수해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이를 승낙한 마자르족은 불가리아를 공격했고 예상치 못한 마자르족의 공격에 시메온 1세는 눈물을 머금고 불가리아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 일로 시메온 1세는 동로마제국을 공략하기 위해서 먼저 뒷마당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치 중국 송나라를 치기 위해 뒷마당 고려를 정리하려 했던 요나라처럼. 시메온 1세는 마자르족의 동쪽에 살고 있는 페체네그족과 동맹을 맺어 마자르족을 협공했다. 남부크강 전투에서 마자르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다뉴브강 하류지역에서 서쪽으로 쫓겨나야 했다. 참고로 이 전투 이후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군을 박살내고(Battle of Boulgarophygon) 매년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교역소는 다시 테살로니키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지만 마자르족은 영원히 다뉴브강 하류 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Battle of Boulgarophygon

Battle of Boulgarophygon, from the Madrid Skylitzes, fol. 109r, detail(출처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한편 서쪽으로 쫓겨간 마자르족은 900년 전후로 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판노니아 평원은 과거 유목 민족인 훈족이 본거지로 삼았을 정도로 말을 키우기가 좋은 곳이다. 같은 유목민족인 마자르족도 이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마자르족은 생계수단으로 약탈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서유럽을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서유럽의 군주와 제후들은 마자르족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공물을 주었다. 공물을 바치지 않은 곳은 어김없이 마자르족이 휩쓸고 지나갔다.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은 물론 저 멀리 이베리아 반도까지 침공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케 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심했던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동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레스부르크 전투 (혹은 브라타슬라바 전투)

마자르족은 900년부터 동프랑크 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사소한 충돌 끝에 907년 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리티슬라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과 마자르족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동프랑크군은 유아왕 루트비히 4세와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가 이끄는 바이에른군이 주축이었고 마자르족은 유목민족 특유의 기마 궁수가 주축이었다. 이 전투에서 동프랑크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사제들, 열아홉에 이르는 백작과 수 만에 이르는 군사가 전사했다. 얼마나 처절하게 당했는지 슈바벤의 기록인 아날레스 알라만니키(Annales Alamannici)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907년, 바이에른 인들이 헝가리인과 벌인 처절한 싸움에서 레오폴트 공작이 죽고 그 병사들의 드높은 자만심이 꺾였다. 싸움에 참가한 교인(기독교인) 중에서 탈출한 자는 거의 없었다. 주교들과 대작들 거의 모두가 살해당하였다.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루이트폴트의 죽음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루이트폴트의 죽음(출처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마자르족의 전투 방식은 동프랑크군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지금까지 동프랑크 왕국의 적은 주로 데인(현 덴마크)족을 비롯한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었다.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은 주로 도끼와 검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프랑크군에게 익숙한 보병대 보병 전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마자르족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군대로 가벼운 무장의 경기병으로 강력한 활을 이용해서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전원이 기마 궁수였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이 기동성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퇴각하여 적을 끌여들이거나 굉장히 빠르게 군을 전개 및 이동함으로써 적의 정신을 쏙 빼놓는 전술, 군이 합류하기 전에 빠르게 각개 격파하는 등 동프랑크군이 이전에 상대했던 상대와 완전히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주로 보병끼리의 근접전과 중기병의 충격 전술에 의존하던 동프랑크의 군대는 이 낯선 전술 앞에 크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전'이라는 단어도 사치다. 큰 전투마다 군 최고 지휘자들이 잇달아 전사할 정도로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 -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 잘츠부르크 대주교 및 19명의 백작 전사
908년 아이제나흐 전투 - 부르하르트 튀링겐 공작, 에기노 튀링겐 백작, 뷔르츠부르크 주교 전사
910년 레히펠트 전투 - 고즈베르트/마나골트 알레마니아 백작 전사
910년 레드니츠 전투 - 게브하르트 로트링겐 공작, 리우거 라덴가우 백작 전사

동프랑크 왕국은 전투에 일가견 있는 게르만의 후예였지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패하기만 하니 마자르족과 맞서 싸우는 걸 포기했다. 레드니츠 전투 이후 루트비히 4세와 바이에른, 로트링겐, 프랑켄, 작센, 슈바벤 공작은 마자르족에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루트비히 4세에 이어 동프랑크(독일) 왕이 된 콘라트 1세도 마자르족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는 906년부터 프랑켄 공작이었기 때문에 큰 전투마다 동료(?) 공작과 백작들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는 왜 콘라트 1세가 마자르족 대처에 소극적이었는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자르족을 물리치면 바닥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겠지만, '나가면 죽는다'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콘라트 1세에 이어 독일 왕이 된 하인리히 1세에게도 마자르의 시련이 찾아왔다. 앞서 3편에서 바이에른 공작과 하인리히 1세가 독일 왕위를 두고 대립했다는 사실을 적었다. 하인리히가 독일 왕이 되자마자(919년 5월 즉위) 그 해 여름 마자르족이 작센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수의 역사학자들은 마자르족과 가까워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 복수를 위해 마자르족을 선동했다고 본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마자르족 입장에서도 신입왕 환영회(?)를 통해 자신들에게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칠 의향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하인리히는 마자르족에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현재 독일 작센 주 퓌하우(Püchau) 인근에서 맞붙은 전투는 마자르족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말해주는 사료가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티트마르의 연대기(Chronicon Thietmari)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왕은 마자르인을 내쫓기 위해 충분치 못한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는 패했고 Bichni(현 Püchau)라는 도시로 도망갔다. 왕은 거기서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그는 시민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그리고 주위 지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많은 선물도 주었다.

비록 얼마나 크게 패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적진 않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왕이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는 점과 후에 퓌하우 도시민에게 큰 보상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전투에서 매우 크게 패했고 많은 군대를 잃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인리히의 반격

몽골의 북쪽에는 홉스골(Khovsgol)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2006년도에 몽골 여행 중 홉스골 호수 2박 3일 승마 트래킹을 한 적이 있었다. 생애 첫 승마라 첫날에는 제대로 말을 몰지 못하고 가이드만 졸졸 따라다니기 바빴는다. 3일 차에서는 나름 전력질주도 하고 나름 말에 익숙해졌다. 나름 기마민족의 후예인가 선천적 재능이 있는가 우쭐해하던 때, 호수 인근에서 한 어린아이를 보았다. 5살 남짓인 꼬마 아이는 안장도 없이 말에 타서 능숙하게 다른 말 두 마리를 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자만심은 강렬한 여름 햇살 아래 눈처럼 녹아 없어졌던 기억이 난다.

홉스골호수 전경

드넓은 초지에서 가축을 기르며 맹수로부터 가축을 지켜야만 하는 유목민은 어려서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승마술과 궁술을 몸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상이 곧 군사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목해야 하는 특성상 평상시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지만 일단 모였다 하면 정말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하곤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4세기경 훈족의 원정 때도, 13세기경 몽골의 아시아 정복 때도 그러했고 마자르족도 마찬가지였다.


농민 전사의 탄생

924년 마자르족은 또 한 번 작센 지방을 약탈했다. 마자르족은 작센 전역을 내달리며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많은 도시와 요새가 불탔다. 하지만 작센 공작이자 독일 왕인 하인리히 1세는 이번에도 마자르족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성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하인리히는 아직 독일 왕국의 군대가 마자르족과 맞서 싸우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훈련되지 않은 자신의 군대를 믿지 못했고, 특히 마자르족과 대규모 회전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마자르족의 약탈 때문에 작센 전역이 피폐해졌지만 하인리히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924년 우연히 마자르족 고위급 귀족을 사로잡은 것이다. 일설에는 마자르족의 초대 대공 아르파드의 아들인 졸탄이라고 하는데, 졸탄이건 아니건 협상카드로 쓸 만한 지도자급 고위 귀족인 건 확실했다. 926년 하인리히는 이 귀족을 풀어주고 마자르족에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마르족과 9년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사실 마자르족의 입장으로서는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었는데, 마자르족은 원래 싸워서 약탈하기보다는 싸우지 않고 공물 받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는 천우신조로 얻은 이 9년의 기간을 마자르족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사용했다. 마자르족과 평화 협정 직후 독일 보름스(Worms)에서 열린 귀족 의회(Hoftag)에서 마자르족 방어를 위한 준비 안이 통과되었다. 이른바 'Burgenordnung' - 영어로 치면 'castle order' 이라고 한 이 명령의 핵심은 보루 건축과 병력 양성이었다. '하인리히의 성'(Heinrichsburgen)이라 불린 보루가 하인리히의 영지인 작센뿐만 아니라 왕국 내 다른 공작령 곳곳에 세워졌다. 보루는 마자르족이 침략할 동안 인근 주민이 대피할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최대 15헥타르까지 넓게 지어졌다.

하인리히는 군대의 편제에도 신경을 썼다. 9명이 한 부대를 이루도록 하고 9명 중 한 명은 보루에 거주하도록 했다. 이렇게 각 부대에서 한 명씩 보루에서 군무에 종사하고 나머지 8명은 보루 인근에서 농사를 짓도록 하여 전비를 감당할 수 있도록 했다. 수확한 곡물의 1/3은 보루 안의 식량 저장소에 저장해야 했다. 또한 재판, 집회, 축제를 보루 안에서 진행하도록 했다. 이들은 평시에도 보루 안에서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중세의 수도사 발두킨트(Waldukind)가 남긴 작센 연대기에서는 이들을 'agrarii milites'라고 적었다.

라틴어인 'agrarii milites'라는 단어는 후대 역사가들에게 늘 논란거리였다. 이 단어를 직역하자면 '농민 전사'라는 상호 모순된 단어의 조합이 나온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작센 연대기를 영어로 번역한 책, 하인리히의 군제 개혁을 설명한 책에도 꼭 라틴어 원문으로 표기하거나 소개하고 있다. 'agrarii milites'라는 단어의 해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 과거에는 라틴어 그대로 그리고 감성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간 '독일의 자유 농민 전사'라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이들이 마자르족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의견이었다. 그 후 60~70년대 학자들은 agrarii milites는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요새를 지키는 등의 극히 제한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고 엘리트 중기병대가 야전에서 마자르족을 무찔렀다고 재해석하고 있다. 중장기병이 입은 사슬 갑옷(Chain mail)이 마자르족이 쏘는 화살을 방어해주고 근접전에서 경무장의 마자르족에게 돌격하여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학자가 K. Leyser이며 이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하인리히가 중기병을 양성해서 마자르족을 격퇴했다고 설명한 문헌이 많다.

의견은 다시 최근에서 와서 바뀌고 있다. Bowlus라는 학자는 그렇게 중기병이 대단하다면 제대로 전투 대형을 갖춘 마자르족에게 돌격하는 중기병에 대한 사료가 왜 존재하지 않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러면서 중기병이 아니라 하인리히는 종심 방어(Defence in depth)라는 전략으로 마자르족의 침공을 저지했으며 이 전략의 중추를 담당한 건 다름 아닌 agrarii milites 였다는 주장이다. 하인리히가 agrarii milites가 규율이 잡히고 난 이후에 슬라브족 중 하나인 Hevelli 족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볼 때 야전에서도 agrarii milites로 대표되는 보병의 역할이 기병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Hevelli족과 전투 이후에 벌어진 렌젠(Lenzen) 전투도 agrarii milites를 비롯한 자신이 양성한 군대에 대한 일종의 시험무대였다. 하인리히의 군대는 여기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제 마자르족과 붙어봐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하인리히는 932년 마자르와의 평화 협정을 먼저 파기했다.

다음 해 봄 마자르족은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작센과 튀링겐을 침공했다. 이게 하인리히에 대한 마자르족의 대답이었다.


마자르족의 침공

933년 작센지방을 침공한 마자르족은 잘레(Saale) 강변에서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한 패는 서쪽의 튀링겐(현 독일 튀링겐주) 지방으로, 다른 한 패는 동쪽의 작센 지방으로 향했다. 서쪽으로 향한 마자르족은 곧 하인리히가 구축해놓은 종심 방어(Defence in depth, 縱深防禦) 시스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종심 방어 개념은 하인리히가 고안해낸 개념이 아니라 로마 후기에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로마가 고안한 수비 전략이다. 이 전략은 크게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요새를 방어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훈련과 장비가 갖춰진 그 지방 병사들
두 번째, 수개월간 원정을 감당할 시간적 재산적 여유가 되는 야전군
세 번째, 잘 훈련된 기동 타격대

이 전략의 핵심이자 기본은 요새화 된 거점이었다. 거점이 종심 방어 전략의 핵심이라 해서 결코 요새에 틀어박혀 다가오는 적을 격퇴하자는 그런 정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국경에 있는 각 요새가 적의 예봉을 무디게 만들고 적의 공세가 보급이나 병력 등의 문제로 한계점에 다 달으면 강력한 야전군이나 기동 타격대로 적에게 반격을 가하는 적극적인 방어 전략이었다.

Hünenburg 상상도

그림 1. Hünenburg 상상도(출처: http://www.ohle-dorf.de/Seiten/burg/index.html)

하인리히가 만든 거점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Fluchtburgen'이라 불리는 요새화 된 대피소였다. 많은 주민과 가축, 재산을 수용해야 했기에 보통 요새보다 컸다. 큰 대피소는 내부 면적이 15헥타르나 되었다고 한다. 주로 인구가 많은 곳 근처에 그리고 쉽게 수비가 가능하고 공격이 어려운 곳에 위치했다. 다른 하나는 강의 여울, 산악로, 늪지대 도로를 비롯한 주요 교통의 요지마다 지은 요새였다. 이 곳에는 마자르족에 반격할 수 있는 기동타격대와 agrarii milites가 주둔하고 있었다. (agrarii milites가 무엇일까요)

하인리히가 구축해놓은 종심 방어에 맞닥뜨린 마자르족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튀링겐 주민들이 마자르족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식량과 재산, 가축을 가지고 근처 대피소로 피난하는 바람에 마자르족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마자르족이 약탈 비즈니스(?)에 나설 때는 별도의 보급대를 두어 식량이나 사료를 운반하기보다는 현지 조달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습을 하기 때문에 정주민들은 미처 식량이나 가축을 옮길 시간이 없었다. 몸만 겨우 빠져나가면 다행이었다. 마자르족은 이들이 남기고 간 식량이나 가축을 통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보급 방식으로 인해 마자르족은 별도의 보급대를 두지 않고도 장거리 원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침략에는 예전처럼 식량이나 꼴 같은 필수 물자를 쉽게 얻을 수 없으니 좀 더 넓은 지역을 수색해야 했다. 같은 병력으로 좀 더 넓은 지역을 수색하려면 필연적으로 좀 더 소규모 그룹으로 쪼개지기 마련이다. 이때가 마자르족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점임과 동시에 agrarii milites들이 활약할 시기였다.

요새에 주둔 중인 정예 기병과 agrarii milites는 흩어져있는 마자르족을 각개 격파했다. 게다가 마자르족이 침공한 시기가 933년 1~2월 경이었고 아직 유럽은 한창 겨울이었다. 많은 수의 마자르족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이렇게 서쪽으로 향한 마자르족의 군대는 하인리히의 종심 방어 전략에 걸려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서쪽으로 향한 마자르족은 메르세부르크(Merseburg) 근처의 한 요새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요새에는 튀링겐 지방의 하급 귀족 비도(Wido)라는 사람과 결혼한 하인리히의 누이가 살고 있었다. 5대 공작 중 둘째라면 서러울 작센 공작의 딸치고 상당히 낮은 신분과 결혼했는데, 하인리히의 아버지와 첩 사이에 생긴 자식 - 즉 서녀였기 때문이다. 서녀이건 아니건 하인리히의 누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에 마자르족은 협상 카드로서 그녀를 사로잡아서 단단히 한몫 챙길 속셈이었다.

하인리히의 누이와 맞바꿀 막대한 재물의 꿈에 들떠있던 마자르족에게 불길한 소식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먼저 서쪽으로 향한 동지들의 크게 패배했다는 소식과 하인리히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인리히는 리아드(Riade)라 불리는 곳 근처에서 진영을 세웠다. 마자르족은 다가온 하인리히의 군대를 요격하고자 공성을 멈추고 진영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불과 거대한 연기로 신호를 보내어 근처 병력을 집결시켰다.

리아데 전투

다음날(933년 3월 15일) 하인리히는 약간의 기병과 보병을 먼저 진군시켰다. 마자르족을 본진으로 유인하기 위한 하인리히의 속임수였는데 마자르족이 이에 멋지게 걸려들었다. 빈약한 하인리히의 군대를 본 마자르족은 하인리히의 선발대를 공격했고, 당연히 하인리히의 선발대는 후퇴하면서 마자르족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이때였다. 하인리히의 중무장 기병대가 별안간 나타나 마자르족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군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중기병들의 돌격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하인리히 1세가 마자르족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그린 삽화, Sächsische Weltchronik, c. 127(출처: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마자르족의 궁기병이 가장 강력할 때는 화살의 유효 사거리만큼 적이 떨어져 있을 때다. 그리고 가장 약할때는 중무장한 병력과의 근접전이다. 경무장의 마자르족은 근접전에서는 중무장한 독일 기병단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자르족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근접전은 될 수 있는한 피하려 했다. 이런 마자르족 바로 앞에 독일의 중기병단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마자르족은 매우 놀란 나머지 이들을 향해 화살 한 발을 쏘고 바로 도망쳤다. 유목민들은 적의 돌격이 맹렬할때 거짓으로 후퇴해서 적의 대열을 흐트러뜨린 후 반격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 후퇴는 거짓 후퇴가 아니었다. 약탈품, 포로를 그대로 두고 도망칠 정도로 진심을 담은 후퇴였다.

하인리히의 기병대는 말이 지치지 않게 8마일(약 12km)만 추격했다. 유목민 군대를 깊숙이 추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퇴한 사례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에 이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마자르족은 후방에서 전열을 재정비 후 다시 공격할 수 있었지만 공격을 포기하고 그대로 작센/튀링겐 지방에서 물러나고 만다. 서쪽으로 간 분견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데다가 하인리히에게 호되게 당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듯싶다. 이 전투에서 양군에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마자르족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독일인들의 입장에서는 꿈에 그리던 승리였다. 전장의 모든 귀족들과 병사들은 '조국의 아버지', '주군', '황제'를 연호했다.

이후 마자르족은 하인리히 재위 중 다시는 작센을 침공하지 않았다.

오토 대제의 등장

하인리히 1세와 선왕 콘라트 1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둘 다 국왕 선거로 뽑힌 왕이다. 이는 얼핏 혈통보다는 정치와 실력으로 누구나 국왕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모순적이게도 독일 왕은 무엇보다도 혈통 중심이었다. 국왕 선거는 게르만의 오래된 관습이지만, 이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후보자는 전왕의 혈연자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전왕은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 선거는 새로운 왕이 그저 전왕의 혈연자라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모두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분은 중요한가 보다. 비슷한 예로는 조선시대 단종과 수양대군의 예를 들 수 있겠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조선의 실질적인 왕이었다.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정당성과 형식 때문에 수하인 한명회와 권람을 시켜(혹은 정황상 신하들이 알아서)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라고 단종을 겁박한다. 수양대군은 왕위를 물려준다는 단종의 거듭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받게 된다.

하인리히 1세와 아내 마틸다

하인리히 1세와 아내 마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아무리 국왕 선거가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진짜 선거다운 선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선왕의 혈통이 끊어졌을 경우나 전왕이 지명한 후계자가 국왕이 되기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을 경우다. 실질적인 독일 왕국의 시작인 콘라트 1세 때는 전왕 루트비히 4세가 혈통이 없이 죽어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하인리히 1세는 콘라트 1세가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독일 왕이 되었다. 그리고 하인리히 1세는 929년 둘째 아들 오토(Otto)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한 후 작센과 프랑켄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를 지칭하는 말 중에 라틴어로 "Primus inter pares"라는 말이 있다. '동료 중 일인자'라는 뜻으로 하인리히는 독일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공을 지배하는 자가 아닌 '여러 대공 중 일인자'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태생이 작센 공작이라 그런지 아니면 여러 공작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제 명대로 못 산 선왕 콘라트 1세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몸소 겪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여러 대공 중 일인자' 하인리히 1세는 다른 공작들과 분쟁을 감수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대신 평화로운 연맹 체제를 선호했다. 반면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위에 오른 이른바 오토 1세, 혹은 오토 대제(독: Otto der Große, 영: Otto the Great)라고 후세에 불리는 오토는 부왕과는 달랐다.

오토는 대관식을 통해 자신이 다른 대공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936년 독일 아헨(Aachen)에서 열린 오토의 대관식에는 다른 4대 대공 -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로트링겐 -이 오토의 개인적인 수행원 역할을 했다. 먼저 아헨이 로트링겐 공작령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길베르트 로트링겐 공작은 대관식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담당했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는 연회를 담당하고, 슈바벤 공작 헤르만은 컵을 운반하는 직책을 맡았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1세는 말을 감독하고 캠프를 만들 장소를 정하고 관리했다. 대공들이 이런 직책을 맡음으로써, 대공들은 새로운 왕에게 복종하고 협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오토 1세에 대한 다른 공작들의 태도는 선왕 콘라트 1세, 하인리히 1세 때와 확연히 달라졌다. 위 두 왕은 즉위한 직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다른 공작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렇게 해서 오토 1세는 평화롭게 독일 왕국을 다스렸답니다"라는 말로 끝날 듯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형제들과 다툼이 새로운 왕의 발목을 잡았다.


앞서 1편에서 프랑크 왕국에 대해 짧게 설명한 적이 있다. 현재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현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크 왕국의 기치 아래 통일시켰던 카롤루스 대제(프: 샤를마뉴, 독: 카를, 영: 찰스)가 죽은 후 베르됭 조약을 통해 넓은 왕국이 세 개의 왕국(동/중/서 프랑크 왕국)으로 쪼개졌다. 동양이나 로마 제국과는 달리 게르만족에게는 토지와 재산을 남자에게 균등하게 상속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 때문에 게르만족이 지배하던 서유럽은 상속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합쳐지는 일이 빈번했다. 하인리히 1세는 자신의 사후 이 관습 때문에 왕국이 쪼개질까 우려하였다. 이에 하인리히는 929년 둘째 아들 오토를 독일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언하고 모든 토지와 재산은 오토가 물려받도록 정했다. 이른바 장자 상속제를 명문화함으로써 향후 독일 왕국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왕국이 분열되지 않기를 바랐던 부왕 하인리히의 희망과는 달리 오토의 동생인 하인리히는 분할 상속 관습을 들어 자신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을 실어준 이는 다름 아닌 오토와 하인리히의 어머니인 마틸다였다. 마틸다는 작은 아들 하인리히를 편애했는데 결론적으로 마틸다의 편애가 두고두고 큰 아들 오토를 괴롭히게 된다.

하인리히 1세의 가계도

맨 위가 하인리히 1세와 마틸다. 그 아래 열은 왼쪽부터 게르베르가, 오토 1세, 하인리히(출처: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일부 수정해서 사용)

이복형 탕크마르(Thankmar)도 오토에 등을 돌렸다. 하인리히 1세가 '장자 상속제'를 명문화했는데 오토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 - 즉 오토가 제일 맏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장자'가 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지실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겠다. 사실 하인리히 1세가 서른 살이었던 906년, 메르세부르크(Merseburg) 백작 에르빈(Erwin)의 딸 하테부르크(Hatheburg)와 결혼해서 아들 탕크마르를 얻었다. 하지만 하테부르크는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이었다. 당시 여자의 중혼은 한국의 조선시대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오토 1세의 누이 게르베르가도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와 결혼 후 프랑스의 루이 4세와 결혼했으며 오토 1세도 늘그막 한 나이에 20대 미망인과 혼인한 적이 있다. 다만 하테부르크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 게 하인리히 1세와 결혼 당시 하테부르크는 수녀였다는 게 큰 문제였다. 교회에서는 하테부르크가 첫 결혼 후 남편과 사별하고 수녀가 되었고, 수녀 시절의 순결 서약이 아직 유효하다면서 혼인 자체를 위법으로 보았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테부르크는 다시 수녀가 되었고 하인리히는 베스트팔리아 백작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게 되었다. 따라서 탕크마르는 적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둘째 아들인 오토에게 후계자 자리가 넘어갔던 것이다. 12세기에 작성된 오토 왕조의 족보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인리히 1세의 후계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오토 왕조의 족보의 어디에서도 탕크마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상속 문제 때문에 하인리히와 탕크마르는 오토에게 불만은 있었지만 오토가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오토는 즉위 후 헤르만 빌룽(Hermann Billung)을 작센 서북쪽의 변경백으로 임명했는데 이 인사가 뜻하지 않게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의 시대

변경백 게로

'변경백(邊境伯)'이란 독일어로 Markgraf라고 하는데, 이는 변경(Mark)과 백작(Graf)이 합쳐진 단어다. 영어의 Margrave의 어원도 이 Markgraf이다. 변경백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지대를 다스리기 위해 임명되었는데 다른 백작과 크게 다른 점은 군사권뿐만 아니라 변경백이 관할하는 지역 내에서 행정권과 사법권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경백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선제공격도 가능했기 때문에 능력이 되면 얼마든지 영토를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 때문에 변경백은 다른 백작보다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의 통치 기틀이 확립되면 보통 행정/사법/군사권이 나눠지기 마련이지만 군사적인 압력을 심하게 받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통치 효율성을 위해 예외적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원스탑 서비스로 처리하는 직책이 생기곤 했다. 물론 변경백은 신성 로마제국 고유의 직책이지만 동서양을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직책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단골 시험 문제였던 고려의 행정구역을 떠올려보자. 고려는 현종 때 전국을 5도 양계(五道 兩界)로 나누었다. 양계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이 큰 평안도 지역(북계)과 여진족과 분쟁이 잦은 함경도 지역(동계)을 말하며 이 양계에 파견되는 관리가 병마사(兵馬使)다. 병마사는 군사권뿐만 아니라 행정권도 가지고 있었다. '안사의 난'으로 유명해진 안녹산(安祿山) 역시 당나라가 돌궐을 막기 위해 북쪽에 파견되어 있는 절도사였고, 이 절도사 역시 병마사처럼 해당 지역의 군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오토는 즉위 직후 헤르만 빌룽(Hermann Billung)을 작센 서북쪽의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당시 작센의 서쪽은 슬라브족과 교전이 잦은 지역이었다. 이 인사는 헤르만의 형 비히만(Wichmann) 백작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히만은 자신이 동생인 헤르만보다 더 나이가 많고 부유하기 때문에 변경백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비히만은 선왕 하인리히 1세의 아내 마틸다의 누이와 결혼한 사이였다. 헤르만보다는 좀 더 "로열 패밀리"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심기가 불편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지 알고도 모른 척했는지 오토는 937년 작센 서쪽 변경백인 지크프리트(Siegfried)가 죽자 지크프리트의 동생인 게로(Gero)에게 변경백 작위를 계승시켰다. 이는 또 한 사람을 화나게 했는데, 오토의 이복형이자 지크프리트의 사촌인 탕크마르였다. 탕크마르 역시 비히만처럼 자신이 변경백이 되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까지 잠재적 반란자들은 늘어갔다.

맨 위의 노란색이 작센 공작령, 그 오른쪽이 헤르만이 임명된 변경백(MARCH OF BILLUNGS) 그 아래가 게로가 임명된 변경백 (출처: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프랑켄 공작도 오토에게 등을 돌렸다. 계기는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지대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이었다. 브루닝(Bruning)이라 불린 작센의 귀족은 프랑켄 공작령과 작센 공작령 사이의 경계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지방 귀족이었다. 브루닝은 자신은 작센인이 아닌 귀족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며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생겼다. 비두킨트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작센 인들은 자신의 공작이 왕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컸다. 화가 난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전전왕 콘라트 1세의 동생. 참고 : 2편 3편)은 브루닝을 공격, 헬메른(Helmern) 성의 주민을 모두 죽이고 성을 불태웠다. 오토는 독일 왕으로 이 사건에 개입, 양 측을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불렀다. 오토는 에버하르트에게 100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여기에 덧붙여 에버하르트 휘하의 지휘관들에게는 개를 끌고 마그데부르크의 모든 거리를 다니라는 형벌을 내렸다. 이를 독일어로 'Hundetragen'라고 하는데 당시 귀족으로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Hundetragen (© Stadtmuseum Berlin | Foto: Michael Setzpfandt, Berlin)

사실 에버하르트가 주제넘은 행위를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에버하르트 입장에서는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형인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자신이 왕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형의 유지를 받들어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독일 왕위를 물려줬다. 게다가 프랑켄 공작에 오르고 나서도 하인리히 1세를 끝까지 지지했고, 이에 하인리히도 에버하르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단적인 예로 하인리히 1세가 로트링겐 지방을 점령한 직후 2년 동안 에버하르트에게 로트링겐 지방의 섭정을 맡기기도 했다. 현재 독일 왕인 오토의 즉위에도 프랑켄 공작의 지지가 큰 힘이었다. 그렇지만 오토는 에버하르트에서 100파운드의 벌금과 수하들에게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당시는 1파운드가 20 실링(shilling)였고, 칼 한 자루가 5실링이었기 때문에 벌금 100파운드는 검 400 자루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얼마나 부유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독일의 5대 공작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라고 예상해본다. 문제는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일 테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 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서운함이 크지 않았을까.

반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은 새로이 바이에른 공작이 된 에버하르트의 반란이었다. 937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가 죽었다. 오토의 대관식에서 말과 캠프를 담당했던 바로 그 공작이다.(참고 : 7편) 바이에른 공작직은 아들인 에버하르트가 이어받았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와는 동명이인인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는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와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가 맺었던 평화조약(참조 : 3편)에 이의를 제기하고 오토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반란이었다. 이와 동시에 오토에게 서운한 감정이 많던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 작센 서북쪽 변경백 헤르만의 형 비히만과 마인츠(Mainz)의 대주교 프레드릭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반란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938년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분기점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공작들에게 패하거나 약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남은 치세 동안 공작들을 제어하기가 힘들어진다. 오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꽤 컸다. 독일 5대 공작(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슈바벤, 로트링겐) 중 바이에른 공작과 프랑켄 공작이 반란에 가담했다. 오토의 칼 끝은 바이에른으로 먼저 향했다. 938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원정을 통해 바이에른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를 공작 직위에서 끌어내리고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의 삼촌 케른텐 변경백 베르톨트를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했다. 베르톨트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바이에른의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참고로 케른텐은 영어로 Carinthia, 독일어로는 Kärnten로서 현재 오스트리아 일부 지방이다.

한편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비히만 백작(8편 참고)과 연합한 탕크마르는 대군을 움직여서 벨레케(Belecke)에 있는 요새를 공격했다. 벨레케는 현재 독일의 중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바스타인(Warstine) 근처에 있는 곳이다. 벨레케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 역사에 기록이 남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라던가 대도시는 아니었다. 다만 이 요새에는 향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귀중한 사람 - 오토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하인리히가 머물고 있었다.(여담이지만 바스타인은 요즘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파는 맥주 바스타이너(Warstiner)의 원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belecke 위치. 좌측에 도르트문트, 쾰른. 우상단에 하노버가 있다.(출처: 오픈스트리트 맵)

탕크마르는 벨레케 전투에서 승리, 왕의 친동생을 손에 넣었지만 그 반대 급부로 슈바벤 공작 헤르만이 확실하게 적으로 돌아섰다. 벨레케 전투에서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의 친척이자 슈바벤 공작의 사촌인 게브하르트(Gebhard)가 탕크마르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것이다. 슈바벤 공작 헤르만은 백작 시절부터 오토 왕조에 충성스러웠고 그래서 공작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오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을 앞장서서 처단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좀 복잡했다. 이번 반란의 중심에는 자신이 속해있는 콘라드 집안의 최고 연장자인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만은 분명 갈등했을 것이다. 다만 벨레케 전투에서 게브하르트가 전사함으로써 헤르만의 갈등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게브하르트의 전사로 인해 프랑크(독일) 지도자들이 분열되었다는 사료를 볼 때, 사촌인 게브하르트가 전사한 후 헤르만은 확실하게 반 에버하르트, 친 오토로 돌아섰다.

한편 탕크마르는 에레스부르크(Eresburg) 성을 장악하고 여기에 많은 주둔군을 상주, 향후 반란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왕의 동생 하인리히의 신병은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가 책임졌다. 하지만 기세 좋던 탕크마르의 반란은 에레스부르크에서 끝났다. 에레스부르크 점령 즈음 반란의 한 축이었던 비히만이 오토에 복종하고 오토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껴 대군을 이끌고 에레스부르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탕크마르는 당연히 공성전을 대비했지만 에레스부르크의 주민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가 왕인 오토였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왔음을 알고 몰래 성문을 열고 왕의 군대를 에레스부르크로 끌여들였다.

938년 7월 28일, 오토의 군대는 에레스부르크로 진입했다. 탕크마르는 교회로 도망쳤다. 하인리히의 부하들이 탕크마르의 뒤를 쫓았다. 탕크마르는 무기와 금 목걸이를 내려놓고 제단 옆에 서있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의미 - 즉 항복의 의미였다. 하지만 주군의 복수에 혈안이 된 하인리히의 수하들은 탕크마르를 용서하지 않았다. 티아볼트(Thiabold)라고 하는 병사는 창으로 탕크마르의 등을 찔렀다. 탕크마르로서는 의외의 기습이었지만 티아볼트의 바람대로 얌전히 죽지 않았다. 비두킨트의 사료에 따르면 탕크마르는 비록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용맹하고 수많은 전쟁터를 헤쳐온 사람이었다. 창으로 탕크마르를 찌른 티아볼트는 탕크마르의 반격에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 순간이었다. 탕크마르 뒤에 있던 창문이 깨지면서 창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그 창은 다시 한번 탕크마르의 등에 꽂혔다.

제 1장 - 황제와 교황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은 '카놋사의 굴욕'부터 북방십자군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다룹니다.

제 2장 - 이교도의 땅

북방 십자군이 발트 인근의 땅을 정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예정입니다. 주 무대는 발트해 인근 독일 및 폴란드 북부, 발트 3국입니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제 3장 기사의 황혼

대북방 전쟁부터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세우고 공작이 되는 1525년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