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르족의 위협

역사상 하나의 민족이 대규모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9세기 후반 마자르족의 집단 이주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사건은 8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이라 불리는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한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 6세는 장인의 요청으로 불가리아 상품이 거래되는 교역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키로 바꾸고 불가리아 상인들에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을 매겼다. 이 조치에 불가리아의 지도자 시메온 1세는 크게 분노해서 즉각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제국을 공격했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가 공격해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로마 군단은 아랍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을 다시 불러오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근처에는 불가리아를 막을 군사력이 없었다. 레오 6세는 꾀를 썼다. 당시 불가리아 북쪽에는 유목민족인 마자르족이 살고 있었는데, 마자르족을 매수해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이를 승낙한 마자르족은 불가리아를 공격했고 예상치 못한 마자르족의 공격에 시메온 1세는 눈물을 머금고 불가리아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 일로 시메온 1세는 동로마제국을 공략하기 위해서 먼저 뒷마당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치 중국 송나라를 치기 위해 뒷마당 고려를 정리하려 했던 요나라처럼. 시메온 1세는 마자르족의 동쪽에 살고 있는 페체네그족과 동맹을 맺어 마자르족을 협공했다. 남부크강 전투에서 마자르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다뉴브강 하류지역에서 서쪽으로 쫓겨나야 했다. 참고로 이 전투 이후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군을 박살내고(Battle of Boulgarophygon) 매년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교역소는 다시 테살로니키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지만 마자르족은 영원히 다뉴브강 하류 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Battle of Boulgarophygon

Battle of Boulgarophygon, from the Madrid Skylitzes, fol. 109r, detail(출처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한편 서쪽으로 쫓겨간 마자르족은 900년 전후로 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판노니아 평원은 과거 유목 민족인 훈족이 본거지로 삼았을 정도로 말을 키우기가 좋은 곳이다. 같은 유목민족인 마자르족도 이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마자르족은 생계수단으로 약탈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서유럽을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서유럽의 군주와 제후들은 마자르족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공물을 주었다. 공물을 바치지 않은 곳은 어김없이 마자르족이 휩쓸고 지나갔다.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은 물론 저 멀리 이베리아 반도까지 침공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케 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심했던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동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레스부르크 전투 (혹은 브라타슬라바 전투)

마자르족은 900년부터 동프랑크 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사소한 충돌 끝에 907년 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리티슬라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과 마자르족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동프랑크군은 유아왕 루트비히 4세와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가 이끄는 바이에른군이 주축이었고 마자르족은 유목민족 특유의 기마 궁수가 주축이었다. 이 전투에서 동프랑크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사제들, 열아홉에 이르는 백작과 수 만에 이르는 군사가 전사했다. 얼마나 처절하게 당했는지 슈바벤의 기록인 아날레스 알라만니키(Annales Alamannici)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907년, 바이에른 인들이 헝가리인과 벌인 처절한 싸움에서 레오폴트 공작이 죽고 그 병사들의 드높은 자만심이 꺾였다. 싸움에 참가한 교인(기독교인) 중에서 탈출한 자는 거의 없었다. 주교들과 대작들 거의 모두가 살해당하였다.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루이트폴트의 죽음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루이트폴트의 죽음(출처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마자르족의 전투 방식은 동프랑크군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지금까지 동프랑크 왕국의 적은 주로 데인(현 덴마크)족을 비롯한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었다.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은 주로 도끼와 검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프랑크군에게 익숙한 보병대 보병 전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마자르족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군대로 가벼운 무장의 경기병으로 강력한 활을 이용해서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전원이 기마 궁수였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이 기동성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퇴각하여 적을 끌여들이거나 굉장히 빠르게 군을 전개 및 이동함으로써 적의 정신을 쏙 빼놓는 전술, 군이 합류하기 전에 빠르게 각개 격파하는 등 동프랑크군이 이전에 상대했던 상대와 완전히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주로 보병끼리의 근접전과 중기병의 충격 전술에 의존하던 동프랑크의 군대는 이 낯선 전술 앞에 크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전'이라는 단어도 사치다. 큰 전투마다 군 최고 지휘자들이 잇달아 전사할 정도로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 -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 잘츠부르크 대주교 및 19명의 백작 전사
908년 아이제나흐 전투 - 부르하르트 튀링겐 공작, 에기노 튀링겐 백작, 뷔르츠부르크 주교 전사
910년 레히펠트 전투 - 고즈베르트/마나골트 알레마니아 백작 전사
910년 레드니츠 전투 - 게브하르트 로트링겐 공작, 리우거 라덴가우 백작 전사

동프랑크 왕국은 전투에 일가견 있는 게르만의 후예였지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패하기만 하니 마자르족과 맞서 싸우는 걸 포기했다. 레드니츠 전투 이후 루트비히 4세와 바이에른, 로트링겐, 프랑켄, 작센, 슈바벤 공작은 마자르족에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루트비히 4세에 이어 동프랑크(독일) 왕이 된 콘라트 1세도 마자르족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는 906년부터 프랑켄 공작이었기 때문에 큰 전투마다 동료(?) 공작과 백작들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는 왜 콘라트 1세가 마자르족 대처에 소극적이었는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자르족을 물리치면 바닥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겠지만, '나가면 죽는다'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콘라트 1세에 이어 독일 왕이 된 하인리히 1세에게도 마자르의 시련이 찾아왔다. 앞서 3편에서 바이에른 공작과 하인리히 1세가 독일 왕위를 두고 대립했다는 사실을 적었다. 하인리히가 독일 왕이 되자마자(919년 5월 즉위) 그 해 여름 마자르족이 작센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수의 역사학자들은 마자르족과 가까워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 복수를 위해 마자르족을 선동했다고 본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마자르족 입장에서도 신입왕 환영회(?)를 통해 자신들에게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칠 의향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하인리히는 마자르족에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현재 독일 작센 주 퓌하우(Püchau) 인근에서 맞붙은 전투는 마자르족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말해주는 사료가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티트마르의 연대기(Chronicon Thietmari)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왕은 마자르인을 내쫓기 위해 충분치 못한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는 패했고 Bichni(현 Püchau)라는 도시로 도망갔다. 왕은 거기서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그는 시민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그리고 주위 지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많은 선물도 주었다.

비록 얼마나 크게 패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적진 않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왕이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는 점과 후에 퓌하우 도시민에게 큰 보상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전투에서 매우 크게 패했고 많은 군대를 잃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