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의 시대

프랑켄 공작이자 동프랑크(독일) 왕이었던 콘라트 1세의 동생 에버하르트 3세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형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 하인리히는 919년 프리츨라(Fritzlar)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독일 왕(하인리히 1세)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의 별명은 ‘매사냥꾼’인데 그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가 마침 매의 둥지를 고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전혀 없어서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하고 있다. 하인리히 1세는 프랑크족이 아닌 최초의 독일 군주이자 독일의 왕과 황제를 배출한 오토(Otto) 왕가의 시조였다.

왕관을 전하는 사자와 마침 매 둥지를 고치고 있던 하인리히(출처 : 위키피디아)

왕관을 전하는 사자와 마침 매 둥지를 고치고 있던 하인리히(출처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한편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한 제국의회에는 오직 프랑켄과 작센 귀족들만 투표에 참여했고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투표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 두 지방 귀족들의 투표 불참은 명백하게 하인리히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리히가 왕이 되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는 하인리히에 반발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하나의 왕국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는 법, 곧 하인리히와 아르눌프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919년 하인리히는 먼저 슈바벤 지방으로 전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치기 위해서였다. 하인리히의 군세를 본 부르하르트는 하인리히에게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충성을 하기로 하였다. 아르눌프는 하인리히에 맞서는 쪽을 택했다. 결국 92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농성하던 아르눌프는 성문을 열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하인리히는 끝까지 자신에게 반항했던 바이에른 공작을 용서하고 자치권과 일부 특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지었다. 바이에른 문제만 붙잡고 있기에는 독일 왕국을 위협하는 시급한 문제가 너무 많았다. 동쪽의 마자르족, 북쪽의 데인족(현 덴마크, 스웨덴 남부에 거주하는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 수시로 국경을 짓밟고 있었다. 전왕 콘라트 1세 때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트링겐 공작령과 그 배후의 서프랑크 왕국도 불안 요소였다.

하인리히는 먼저 로트링겐을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되찾았다. 923년 서프랑크 왕국 내에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자 하인리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트링겐을 공격했다. 결국 925년 로트링겐 공작 길베르트는 하인리히에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독일 왕국은 4대 공작령(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프랑켄)에서 루트비히 4세 시절의 5대 공작령으로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하인리히는 작센의 북동쪽 슬라브족에 대해서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하인리히 이전에는 슬라브족을 간접적으로 지배했지만, 928~929년 원정부터는 아얘 직접적으로 영토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특히 929년의 렌첸(Lenzen, 현 독일 브란덴부르크) 전투에서 슬라브족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중 하인리히에게 남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동쪽의 마자르족이었다.